2분 10개 / 5분 1개 크로키 연습.
--매일 필사--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 김하나, 황선우]
아열대의 공항에 내리면 코가 먼저 반응한다. 평생 비염과 더불어 살아온 나는 건조한 계절이면 코로 숨 쉬기가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동남아 어느 도시나 사이판 같은 더운 섬의 공항에 도착해 밖으로 한 발 내딛을 때면 후끈하고 습한 공기가 순식간에 몸을 감싸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그렇게 체온이 훅 올라갈 때 느끼는 기쁨은 천진하게 달려드는 강아지를 온몸으로 껴안는 듯한 기분이다. 몇 시간의 비행 이후 펼쳐지는 전혀 다른 공기와 햇볕, 식물들과 풍경, 건축양식과 음식의 총체적인 경이로움은 각각의 요소를 따로 떼어놓는 게 무의미한, 한 덩어리로 다가오는 그곳만의 특질들이다.
황선우가 말했다. “창밖으로 플라타너스들이 눈 아래 일렁이는 게 바다 같았어.”
그리고 차에 타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나도 좋아.”
나는 그 순간 세상 모든 플라타너스 잎이 한꺼번에 펄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완성되어 내 집의 한 벽을 가득 메운 책장은 대단히 멋있고 아름다웠다. 키 156cm에 체구도 자그마한 내 친구가 손으로 직접 만든 육중하고 근사한 가구. 책을 꽂는 기능을 넘어선 뭔가 엄청난 것이 내 집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월넛과 오크의 아름다운 색깔과 무늬, 두툼하고 단정한 선들, 매끄럽고 따뜻한 표면의 질감, 칸칸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균형. 이 가구는 집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을 재배열했다.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다. 소품이나 가구를 들이더라도 책장과 결이 맞을지 고민하기 시작했고 아주 신중해졌다. 이제 내 집의 가구와 물건들은 이후의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쓰는 것들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물건’을 마련할 그날 같은 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제대로 된 물건이 얼결에 들어서버리자 생활이 가지런해졌다. 아름답게 잘 만든 물건의 힘이란 이토록 강력하다. 내게 있어 자취가 아닌 독신 생활은 정확히 이 책장이 들어온 날 시작되었다.
가족과 함께 살던 시절에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침잠을 깨웠다. 뭘 썰거나 끓이거나 기름에 굽거나 하는 주방의 생활 소음은 너무 구체적이고 현실감 넘쳐서 꿈에서 미처 깨어나기 전의 몽롱한 정신에는 이물감이 느껴졌다. 아직 지각이 선명하지 않은 감각 기관 중에 코끝으로 음식 냄새가 제일 먼저 스며드는 게 그때는 불쾌하게 다가왔다. 눈 뜨자마자 식탁에 음식이 준비되어 있다니, 지금이라면 행복감에 넘쳐 벌떡 일어날 텐데 말이다. 가족을 떠나 혼자 산다는 것은 누구도 음식 냄새로 나를 깨워주지 않는 아침이 수천 번 이어지는 일이었다.
혼자의 식탁은 효율성과 편의를 우선으로 꾸려진다. 삶은 달걀 한두 개에 사과나 고구마 같은 걸로 때우기도 하고 햇반을 데워 레토르트 카레와 해결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비롭게도 인간은 자신을 위해서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 더 부지런할 수 있는 존재다. 누군가와 함께 먹을 식사를 차린다면, 무슨 힘에선지 국이라도 하나 끓이고 더운 찬이라도 한 가지 볶게 되는 것이다.
새해 첫날이니까. 한 해를 지나면서 실패하고 실수하며 생채기를 많이도 내겠지만 지금은 저 달처럼 온전하게 둥글고 꽉 찬 365일을 선물같이 받아 든 1월 1일이다. 간절하게 지키고 싶은 것들이, 멋지게 이루고 싶은 일들이 여럿 떠오르는 1월 1일 말이다.
[쇼코의 미소 / 최은영]
저렇게 제멋대로고 충동적이고 마음 여린 이상한 사람. 이상한 나의 할아버지. 저 엉망진창인 사람. 나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할아버지가 씌워준 우산을 쓰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할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냥 한두 시간만이라도 텔레비전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새벽에 눈을 뜨면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단단한 땅도 결국 흘러가는 맨틀 위에 불완전하게 떠 있는 판자 같은 것이니까. 그런 불확실함에 두 발을 내딛고 있는 주제에, 그런 사람인 주제에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니.
크게 싸우고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주 조금씩 멀어져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사람들은 후자다.
내 적막한 마음에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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