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공부

05.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대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M.R. 2024. 3. 30.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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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심심한 M.R.입니다. 

이번에는 역사상 위대한 천재 중 한 명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대해서 공부해보려고 합니다. 

 

 

Francesco Melzi - Portrait of Leonardo 출처 : wikipedia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이탈리아어: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1519년 5월 2일)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석학(polymath)입니다. 화가이자 조각가, 발명가, 건축가, 해부학자, 지리학자, 음악가였지요.

2007년 11월에 네이처 지가 선정한 인류역사를 바꾼 10명의 천재 중에 가장 창의적인 인물 1위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차지했습니다. 다빈치가 역사상 가장 창의적인 융합형 인재로 평가된 것입니다. 그는 평생 기술과 과학 그리고 예술을 하나로 융합하려는 창의적인 노력을 끓임 없이 시도하였습니다.

그의 여러 작품 중 오늘날 가장 유명한 것은 모나리자입니다. 모나리자 없이는 루브르 박물관을 논할 수 없다는 평가가 존재할 정도로 모나리자라는 작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며,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매우 유명한 그림입니다. 그 외에도 '최후의 만찬'은 그의 대표작으로 세기의 명작으로 손꼽을 수 있습니다. "모나"(mona)는 유부녀 이름 앞에 붙이는 이탈리아어 경칭이고, "리자"(Lisa)는 초상화의 모델이 된 여인의 이름입니다.

 

모나리자는 여러 가지 면에서 선구적인 작품으로 당시로서는 새로운 방식인 유화기법을 사용했으며, 선을 부드럽게 하는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 있습니다. 구도는 당시에 가장 기본적인 초상화 구도였던 피라미드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또한 인물을 배경보다 높게 배치하는 방식은 오늘날 화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지만 르네상스 시대에는 드문 방식이었습니다. 모나리자는 이 방식을 사용하였지요.

 

 

모나리자 (1503-1506) 출처 - artvee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토요일 새벽 3시에 토스카나 지방의 산골 마을 빈치(Vinci)에서 태어났습니다. 다빈치의 태어난 시간까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공증인이었던 그의 조부 안토니오의 직업적인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조부는 중요한 일들을 공증문서 노트 뒷 여백에 기록해 두곤 하였다고 합니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 열네 살 때,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주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갔습니다. 베로키오는 그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공방을 이끌던 실력 있는 예술가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그곳에서 20대 초반까지 미술 및 기술 공작 수업을 받았습니다. 제자의 재능을 알아본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을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만 몰두할 정도로, 레오나르도를 제자가 아닌 화가로서 존중했습니다.

 

1472년 수업을 끝내고 피렌체 화가 조합에 등록하여 한 사람의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476년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그림인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에 조력하고, 그 좌단에 천사를 그렸는데, 스승을 능가하는 천재성을 보였습니다.


레오나르도는 1481년까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많은 노력을 했으며, 1466-1482년을 그의 제1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당시의 작품으로 <석죽의 성모> , 성모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에게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들은 이야기인 <수태 고지>, <베노바 가의 성모> 등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그려진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이미 레오나르도의 독창적인 구도와 분위기 표현 기술을 엿볼 수 있습니다.


1481년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귀족 가문의 화가로 초빙되어 갔는데, 1482-1499년을 제1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릅니다. 밀라노에 간 목적은 스포르차 가의 선조인 프란체스코의 기마상 제작과 음악 교수 때문이었습니다. 약 17년 동안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조각가, 건축가, 기사로서 오늘날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의 다방면에 걸친 천재성을 발휘했습니다.

이 시기에 세계 미술사에서 가장 뛰어난 그림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암굴의 성모〉(1483년, 루브르 박물관)와 〈최후의 만찬〉(1495~1498년, 밀라노)이 제작되었습니다. 〈암굴의 성모〉에서는 레오나르도 특유의 화법인 스푸마토(Sfumato)가 첫선을 보이게 되며, 뒤에 이 화법을 바탕으로 유명한 〈모나리자〉(1500~1503년, 루브르 박물관)가 그려졌습니다. 스푸마토는 원거리에서 물체를 둘러싼 공기(대기)까지 그림으로써 완전한 삼차원의 세계를 그리는 기법으로 대기 원근법(aerial perspective)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의 통제에 따라 제작되던 교회 미술계의 풍토를 깨고,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등 자신의 소신에 따른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1489년 인체와 말의 해부학적 연구에 몰두하고, 인체의 해부와 조류의 비상에 관한 논문, 광학에 대한 연구에도 전심하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1495-1498) 출처 : wikipedia

 

 


1500-1506년을 그의 제2의 피렌체 시대라고 하는데, 1499년 프랑스 왕 루이 12세의 밀라노의 침입으로 1500년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제단화 <성 모자와 성 안나>를 그리고, 1502년에는 체잘레와 보르지아에 토목 사업 운하 개발 도시 계획을 위해 초청되었습니다. 1503년에는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는 그의 과학 연구가 한층 성장하여 새가 나는 방법, 지질학과 물의 운동, 해부 등에 관한 수기를 남겼습니다.

1506년 밀라노에서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2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는데, 1506-1513년을 그의 제2의 밀라노 시대라고 부릅니다.

1513년 10월,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다빈치는 새로운 통치자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그가 교황군 사령관직을 맡게 되면서 1513년 10월에 함께 로마로 이주하였습니다. 로마에서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계속 받으며 생활하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일이 꼬여만 갔습니다. 1515년에 들어서면서 다빈치는 새로운 후원자를 찾아 로마를 떠나길 원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1516년 이후 프랑스에서 계속 거주하며 활동하던 다빈치는 서서히 기력이 약해지자 소일거리를 하는 시간이 증가하였습니다. 1519년 4월 23일, 죽음을 직감한듯, 유언장을 작성하였습니다. 유언장에서 그는 사후 프랑스에 묻히길 희망했고 그의 동성애 상대였던 살라이와 다빈치의 하인 바티스타에게 밀라노 공작에게 받은 포도밭을 반씩 나누어 상속하며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모나리자' 등의 그림과 메모가 적힌 노트들을 제자인 멜치에게 상속한다는 내용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1519년 5월 2일 그의 나이 67세에 프랑스 클로 뤼세(Clos Lucé)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1511~1574)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에서 다빈치가 프랑수아 1세의 품 안에서 숨을 거뒀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프랑수아 1세는 레오나르도의 임종 시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유해는 다빈치의 유언에 따라 생 플로랑탱 교회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혁명으로 혼란스럽던 시기인 1802년 교회 건물이 해체되면서 그곳에 있던 모든 묘지들이 파묘된 후 모두 훼손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유골은 현재 남아 있지 않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자식을 남기지 않았고, 그의 제자이자 동반자였던 프란세스코 멜지(Francesco Melzi)가 그의 유산을 상속하였습니다. 1570년 프란세스코 멜지의 죽음으로 그가 평생 간직하고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엄청난 양의 크로키와 그림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출처 : 글-wikipedia  그림 -wikipedia, artv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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