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공부

03. 인상파의 개척자, 클로드 모네

M.R. 2024. 3. 1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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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쓰고 그림그리는 심심한  M.R.입니다. 오늘은 빛을 그린 화가 클로드 모네에 대해서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클로드 모네(프랑스어: Oscar-Claude Monet, 1840년 11월 14일~1926년 12월 5일)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로,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상파의 창시자이자 개척자입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생동감 넘치고 인상적인 작품으로 유명한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로  종종 자연, 풍경, 정원뿐만 아니라 수련과 지베르니의 다리를 그린 일련의 그림을 묘사했습니다. 모네는 주변 세상에 대한 순간적인 인상을 전달하기 위해 붓과 물감의 획을 사용하여 그의 작품에서 빛과 색상 변화의 효과를 포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예술 발전에 중요한 것으로 평가되며 세계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클로드 모네는 1926년 12월 5일 폐암으로 8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는 1840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내다 그곳에서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시슬레·르누아르·바지유 등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하였습니다. 마네를 중심으로 르누아르 및 피사로·드가·세잔 등과 함께 신예술 창조에 전력하였습니다. 1867년 그의 뮤즈이며 애인이었던 카미유가 그의 첫 아들 장을 낳았습니다. 1869년 르누아르와 함께 파리에서 가까운 센 강변의 라 그루니에르에서 함께 작업했습니다. 1870년 모네는 카미유와 결혼했으며, 이어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1871년 가족과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윌리엄 터너, 존 컨스터블 등의 영국 화가의 작품을 접했습니다. 그곳에서 터너 등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명쾌한 색채표현이란 점에서 커다란 기술적 향상을 그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파라솔을 든 여인 - 모네 부인과 그녀의 아들(1875)

 

 

  1871년 프랑스로 돌아와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했습니다. 1873년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으로 이뤄진 무명 예술가 협회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훗날 인상주의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귀국 후 1874년 동료 화가들과 함께 첫 번째 그룹전, 제1회 인상파 전람회를 열어 '인상, 해돋이'를 출품했습니다. 그러나 출품된 작품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해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습니다 이 전시를 관람한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대한 조롱의 의미를 담아 처음으로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인상파란 이름이 모네를 중심으로 한 화가집단에 붙여졌습니다. 모네는 이후 1886년까지 모두 8회 동안 이어진 인상파 전시에서 5회에 걸쳐 여러 작품을 출품하여 인상파 지도자로서의 위상을 굳혔습니다.

 

 

인상, 해돋이, Impression, soleil levant

 

 

  《인상, 해돋이》(프랑스어: Impression, soleil levant)는 클로드 모네가 르아브르 항구의 아침 풍경을 그린 유화입니다.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유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파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에서 소장되어 있으며, 1985년 한 차례 도난당한 뒤 1990년 다시 되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모네는 1890년 이후부터 하나의 주제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대표작으로 '수련'이 있으며 이 시기에 그린 작품은 대부분 지베르니의 정원을 소재로 한 것입니다. 모네는 젊은 시절 지베르니의 풍경에 감탄하면서 "내가 이 다음에 큰 돈을 벌면 지베르니에 집을 얻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늙어서도 그 풍경의 아름다움을 잊지 않았는지 모네는 정원사를 여섯 명이나 두었는데도 자신 또한 정원 관리에 참여했습니다.

 

 

 

수련

 

  모네의 대표작인 연작인 '수련'은 250여점 정도로 워낙 많이 그려져서 외국의 웬만한 네임드 미술관은 하나씩 나눠 갖고 있습니다. 상설 전시로만 여덟 점을 걸어놓고 있는 파리의 오랑주리 미술관이 독보적이고 마르모탕도,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MoMA, 보스턴의 보스턴 미술관, 시카고의 시카고 미술관, 도쿄의 국립미술관과 후지미술관, 런던의 영국 국립미술관도 수련 연작을 나눠갖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간 없다가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이 개인 컬렉션으로 가지고 있던 것을 사후 국가에 기증해 국립현대미술관에 한 점 걸리게 되었습니다.

 

 이름 때문에 에두아르 마네와 헷갈려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알파벳 철자도 모네(Monet)와 마네(Manet)로 한 글자 차이. 사실 모네 생전에도 이름이 유사한 데다가 동시대에 같은 분야에서 활동하던 모네와 마네를 혼동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마네는 처음에는 자신보다 한참 후배인 모네와 혼동되는 것을 불쾌하게 생각했지만, 모네를 만나고 가까워진 이후로는 평생 동안 그와 교류했습니다. 위의 <풑밭위의 점심식사>도 마네의 동명의 그림을 패러디 한 것.

 

  일상을 밝고 아름다운 색채로 그려내 행복을 그린 화가로 불리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도 평생의 절친이었습니다. 비록 르누아르가 후기에는 인상파 화풍을 버리기는 하지만, 인상파가 인정받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이던 어려운 시절을 동고동락한 좋은 친구 사이였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바라왔던 곳에 집을 얻고 부유한 생활을 하던 모네였지만 그에게 크나큰 시련들이 닥칩니다. 가난했던 시절 함께 배고픔을 견뎌냈던 친구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기 시작하고 모네 본인도 백내장에 걸려 다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모네는 백내장에 걸려도 자신은 그림을 그려야겠다며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을 불태웠지만 점점 시력이 악화되어 간 탓에 말년에는 회화의 상태가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백내장이 악화된 1910년대 후반~임종 직전의 수련 그림은 매직아이를 보는 수준으로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그저 수많은 선의 모임으로만 보입니다.

모네는 거의 실명해가는 상태에서도 빛에 따라 달라지는 정원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죽기 1년 전인 1925년까지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죽어가는 노화가의 마지막 투혼인 셈입니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린 그의 말기 회화가 추상화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글, 그림 출처 - wikipedia, 나무위키, artv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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