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공부

02. 인상주의 거장, 태양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M.R. 2024. 3. 13.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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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쓰고 그림그리는 M.R.입니다.

오늘 알아볼 화가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인상주의 거장으로 불멸의 화가, 태양의 화가라 불리는 빈센트 반 고흐입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해바라기, 자화상 등등 많은 그림들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빈센트 빌럼 반 고흐(1853년 3월 30일 ~ 1890년 7월 29일)는 네덜란드의 화가로서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전부(900여 점의 그림들과 1100여 점의 습작들)를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하기 전의 단지 10년 동안에 만들었습니다. 고흐는 살아있는 동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후에 인정 받았습니다. 특히 1901년 3월 17일 파리에서 71점의 그림을 전시한 이후 명성을 얻었습니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

 

 

 

 

반 고흐는 흔히 탈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분야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의 작품과 그 동시대 작품을 전시합니다. 네덜란드의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박물관도 상당히 많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소장했습니다.

 

 

홀랜드 시기


빈센트는 언급할만한 가치를 지닌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경탄해마지 않았던 옛 화가들의 그림을 자세하게 살펴보고, 그 중의 몇 개의 작품들을 모사함으로써 미술에 대한 지식과 재주를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그가 홀랜드에서 보낸 1880년-1885년 사이에 17세기에 활동했던 두 명의 네덜란드 화가가 그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렘브란트와 프란스 할스가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그들로부터 그는 다양한 갈색조, 회색조, 흑색조의 색채를, 음영이 뚜렷한 회화 기법을, 눈에 그대로 보이는 거친 붓자국이 있는 진하게 칠한 채색 기법을, 그만큼 더 강렬한 전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부적인 묘사를 포기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는 옛 거장들이 그림들을 지나치게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서 아주 경탄해마지 않았고, 빈센트 자신도 평생 동안 이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고흐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세계를 다루었습니다. 빈센트는 '홀랜드 시기'에 일을 하고 있는 농부들, 그들의 가난한 오두막, 수공업자들을 그렸습니다. 정물화에서는 특이하게도 감자가 자주 발견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그림에 진실될 것과 분위기, 감정 혹은 생각을 전달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는 이런 요구가 자신이 모범으로 생각하는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충족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감자먹는 사람들 The Potato Eaters (1885)


이 시기에 제작된 가장 야심차고 유명한 그림은 1885년에 그려진 〈감자먹는 사람들〉입니다. 그 그림에서는 소박한 식사를 하는 농부 가족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빈센트는 그 그림으로 시골 사람들이 땅과 맺고 있는 상태와 가혹한 삶을 묘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 그림에 상당한 노력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집단으로 묘사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빠듯한 생활비에도 불구하고 모델들을 고용했고, 여러 장의 습작을 그렸습니다. 〈감자먹는 사람들〉이후로 빈센트는 더 이상 여러 인물들이 배치된 작품을 그리지 않았고, 단 하나의 그림에 그처럼 많은 노력을 쏟아붓지도 않았습니다.

 

 

 

발전의 시기: 안트베르펜과 파리 시장


파리에서 그는 그 당시에 중요하게 간주되었던 인상주의와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인상주의를 이름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양식에 대해서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인상주의의 여러 요소를 자신의 회화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좀 더 밝고 순수한 색채를 사용했고, 가는 선으로 그은 듯한, 점 모양의 특징을 지닌 붓 놀림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화면을 보색 관계를 이루는 색채로 구성했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그림과 만남으로써 좀 더 대담해진 색채 사용으로의 방향 전환이 강화되었습니다. 주제상으로 보자면 그는 파리적 소재에 관심을 기울였고 파리 주변의 시골에서도 그는 자주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 시기에 인상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는 〈봄날의 낚시〉, 〈클리시 다리〉, 〈아스니에르의 다리 모습〉,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소밭〉 등이 있습니다.

 

 

몽마르트 언덕의 채소밭, 1887년

 

 


하지만 그의 예술적 발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일본 판화와의 만남이었습니다. 1853년 일본은 국경을 개방했으며, 그로부터 몇 년 동안 점점 더 판화를 찍은 종이가 유럽으로 전해졌습니다. 많은 미술가들이 전혀 새로운 미술에 열광을 했고, 빈센트도 매혹되었습니다. 그는 일본 채색 판화를 모으기 시작했고, 몇 개의 소재를 유화 작품으로 옮겨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일본의 미술관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그들의 형상 원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실제적으로 그 이후부터 제작된 그의 그림에는 이런 저런 '일본적' 형상 원칙이 나타났습니다. 몸 때문에 생긴 그림자의 부재, 가는 선으로 테두리가 둘러쳐진 '얕게' 채색된 화면, 이례적인 원근법, 풍경 속에서 아주 작게 묘사된 인물들이 그런 원칙들이었습니다.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1888)


빈센트는 이 기간 동안 일본화를 접하고 관련 작품을 열렬히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화의 밝은 색채와 캔버스 공간의 사용, 그림에서 보인 선의 역할에 감탄했으며, 이러한 인상은 그에게 강하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때 빈센트는 일본풍으로 약간의 그림을 그려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별이 빛나는 밤〉,〈해바라기〉 등의 걸작들을 그렸습니다. 즉, 고흐의 그림 속에는 정신적인 고통과 이를 극복하고자 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아를(Arles) 시대


아를에서 빈센트는 파리 시절에 이론적으로 발전시켰지만 지금까지는 일관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던 새로운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죽을 때까지 본질적으로 유지했던 이 화법은 우리가 오늘날 빈센트에게서 '전형적' 이라고 느끼는 화법입니다.
고흐는 남부 프랑스의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고서 아를로 이주를 했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주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 사람들은 그곳에서 붉은색과 초록색, 푸른색과 오렌지색, 짙은 노랑색과 보라색의 아름다운 대조를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야. ”

 

실제로 그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나란히 사용했던 순수하고, 강력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방색', 다시 말하자면 대상의 자연적인 색을 넘어섰습니다. 종종 그는 색채를 과장하거나 그가 각각의 그림을 위해서 발전시킨 색채 체계에 적합하도록 사용했습니다. 빈센트의 그림에서는 초록색 하늘, 분홍색 구름, 짙은 청색의 길이 있습니다.
“ 나는 색채의 위치를 정하는 것에 있어서 자연으로부터 일련의 순서와 정확성을 받아들였어. 나는 무의미한 짓을 하지 않고,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연을 세세하게 관찰하지. 내가 사용한 색이 내 그림에서 훌륭한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것이 사물의 색과 동일한 색인지하는 문제는 더 이상 내게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결코 야하거나 벽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나머지 색을 약화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중간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조화로운 전체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Le Café de nuit (밤의 카페) (1888)

 

그 이외에도 색채는 빈센트 반 고흐에게는 상징적 기능도 지니고 있습니다. 〈밤의 카페 풍경〉(1888년)처럼 색채는 분위기를 표현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 나는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무시무시한 인간의 정열을 표현하려고 했어. 공간은 푸르고 붉으며 생기없는 노란색이지. 가운데에 초록색 당구대가 놓여 있고, 오렌지색과 초록색의 둥근 불빛을 만들어내는 레몬처럼 노란 4개의 램프가 있지. ”

 

고흐는 재빠르게, 즉흥적으로 그리고 나중에 커다랗게 수정을 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신속하게 그리는 그의 화법은 한 편으로는 그의 창작욕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 아주 의식적으로 그것을 표현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그림에 더 많은 생기와, 강렬함과 직접성을 부여한다고 했고 또한 그는 좀 더 커다란 전체 효과를 위해서 소재를 단순화했습니다. 비록 그가 재빠르게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충동적으로 그리거나 도취해서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에 그는 머릿속으로 그려보거나 여러 장의 스케치를 통해서 준비를 했습니다.

거의 언제나 그는 소재를 눈 앞에 두고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기억이나 생각에 의존해서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눈으로 본 것을 종종 심하게 변행을 시키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에 충실한 상태였고, 추상으로 통하는 경계선을 넘어서지는 않았습니다.

고흐는 물감을 희석하지 않은 채 걸죽하게 칠했으며, 가끔씩 물감을 튜브에서 짜서 직접 화폭에 바르기도 했습니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것을 인해서 그의 붓자국이 입체적으로 보였고, 고흐 특유의 붓놀림을 통요시키는 것에 아주 적합했습니다. 매끄럽고, 윤곽선이 둘러쳐진 일본풍의 채색면 이외에도 빈센트는 이미 파리 시절에 색을 짧은 선 모양으로 나란히 칠하는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자신의 그림을 좀 더 생생하고 살아있는 것처럼 형상화하기 위해서 그는 생 레미 시절에는 이런 선을 율동적으로 구성하고, 물결 모양, 원 모양, 나선형 모양으로 배열하기 시작했습니다. 1889년에 제작된 자화상이나 1889년에 그려진 〈별이 빛나는 밤〉이 그것을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빈센트는 각각의 화법을 소재와 연관지어서 선택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단순하게 재현하는 것이 고흐의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소재가 지닌 본질과 특성 그리고 자신이 그것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중요했습니다. 


그 밖에도 고흐는 다양한 상징을 통해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많은 그림에서 그는 언어를 통해서 말할 수 없었던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전래된 상징 이외에 그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상징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상징 언어의 의미는 그의 생애, 사고와 감정 세계에 대한 앎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스케치 판, 파이프, 양파, 봉랍이 있는 정물화에서 그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던 물건들을 배열했습니다. 건강 지침서와 그 책에서 불면증에 대해서 좋다고 권해준 양파, 그가 좋아하던 파이프와 담배통, 테오가 보낸 편지 한 통과 친구와의 밀접한 결합을 상징하는 봉랍, 삶의 불꽃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불타고 있는 촛대, 금주의 상징인 빈 포도주 병등이 그와 같은 대상들이었습니다.

 

 

나무뿌리

 

1890년 7월 29일, 고흐는 정신병으로 인한 자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고흐가 정말 자살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고흐의 마지막 작품은 〈나무 뿌리〉입니다. 미완성의 작품으로, 현재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출처 - 글 : wikipedia  사진 : artv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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