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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64주년 4.19 혁명 기념일입니다.

M.R. 2024. 4. 19.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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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심심한 M.R.입니다.

 

 

 

오늘은 제 64주년 4.19 혁명기념일입니다.



 

4·19 민주혁명 혹은 4·19 학생운동, 4·19 의거, 4월 의거, 4월 혁명, 미완의 혁명 등으로도 불립니다. 5·16 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서는 '의거'(義擧)로 불리다가 문민정부부터 혁명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60년 4.19 혁명.

 

 

 

File:4.19 혁명.jpg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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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四一九革命) 또는 4월 혁명(四月革命)은 1960년 4월 19일 대한민국의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정부의 부정부패에 대항하여 일으킨 민주 항쟁입니다.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개표조작에 반발해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이 시위를 시작했고 대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하며 전국적으로 확대된 반독재 투쟁이자 혁명이었습니다. 부정 선거 당시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 선거를 저질렀습니다.

3·15 마산 의거에 참여한 16세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이 실종된 지 27일 만인 4월 11일 아침,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의 허종 기자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지며 격화되었습니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시위 후 귀교 중 피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4월 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습니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 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이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6월 15일(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습니다.

개정된 헌법에 따라 국회는 참의원과 민의원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보선에 의해 지명된 장면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국무총리에 취임하였습니다.

 

 

3.15 부정선거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자기 사망하여 이승만이 단독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인 장면은 건재하였고, 이에 자유당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어느 선거보다도 부정선거활동에 열을 올렸습니다. 정부로 하여금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하도록 하는 등 선거에 승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였습니다.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독재정치, 부정부패를 물리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대구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2·28 대구 학생의거)

3월 15일 자유당의 대대적인 3·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내무부장관 최인규는 무자비하게 강경진압함으로써, 마산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이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결국 3월 18일 내무부장관 최인규와 치안국장 이가학이 마산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고, 내무부장관이 홍진기로 교체·임명되는 등 정국을 수습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4월 18일의 서울의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정오에 총궐기 선언문을 발표한 후, 세종로-태평로 일대로 진출해 시위를 벌였습니다. 하지만, 유진오 고려대학교 총장 등의 만류로 하오 4시쯤 데모를 중단하고, 평화행진을 하면서 귀교하는 도중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종로구 단장 임화수 등 폭력배들로부터 취재한 기자들 일부와 함께 학생들이 피습된 4·18 고려대학생 피습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시위 목적도 부정선거 규탄에서 독재 타도로 전환시켰다는 데 그 의의가 큰 사건)

4월 19일 데모의 구호는 <3·15 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수호를 요구하는 혁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서울 시내가 완전히 무정부상태에 빠지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데 이어 유혈 사태가 벌어진 부산·대구·광주·대전에도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밤늦게까지 산발적으로 계속되던 시위는 송요찬 계엄사령관을 필두로 계엄군이 서울에 진주하면서 일단 가라앉았으나, 하루 동안의 시위로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라는 엄청난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4월 25일과 4월 26일의 데모로 이어졌습니다.

 

 

3.15 의거 결과
3·15 의거는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맞서 시민과 학생들이 항거한 사건으로, 이후 전 국민적 분노와 함께 4.19 혁명의 도화선이 돼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게 된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3.15 의거는 지난 2001년 제정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을 통해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됐으나, 4.19 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독자적인 위상을 갖지 못했다가, 2010년 3월 9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사실상 '국가기념일'로 확정됐습니다.

또한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투표소에서 부정표를 발견한 한 시민이 선관위에 항의하자 정치 깡패가 무자비하게 폭행한 것이 발단이 돼 시민 1천여 명이 낮 12시 45분부터 금남로에 모여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습니다.

 

 

 

제 2차 마산 시위
전라북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경상남도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1960년 3·15 마산 의거 때 행방불명되었던 열사 김주열의 시체가 약 한 달 뒤 즈음인 4월 11일 바다에서 발견되어 검시가 이루어졌는데, 검시 결과가 발표되지 않자 시민들이 병원으로 들어가 눈에서 뒷머리까지 최루탄이 박혀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김주열 시체 인양사건이 알려지면서 당시 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어, 부정선거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이날 시위대는 마산경찰서 무기고 문을 파괴하고 수류탄 1~3개를 탈취했으며 경찰서장실 앞뜰에 투척 폭발시켰습니다.

 

 

 

4.18 고려 대학생 피습 사건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 3천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한 후 귀교하다가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아한 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한 사건,  신입생 환영회 날이었던 이날 오후 12시 50분 전교생은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궐기하자」는 내용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교문 밖으로 진출, 국회의사당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의사당 앞에서 △경찰의 학원출입 금지 △마산사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마친 후 귀교길에 올라 질서 정연하게 행진하던 중, 선두가 종로 4가 천일극장 부근에 이르렀을 무렵 쇠갈고리·쇠사슬·쇠망치 등으로 무장한 50~60명의 괴한들이 튀어나와 학생들을 무차별 난타했습니다.
(가해자 : 신도환의 대한반공청년단, 동네깡패 임화수)

자유당이 사육한 이들 폭력배와의 약 30분에 걸친 난투극 끝에 한상철이라는 학생이 죽고 50여 명의 학생이 부상당했으며, 현장을 취재하던 사진기자 3명이 카메라를 빼앗기고 구타당했습니다. 이 4·18 고대생시위대 피습사건은 이튿날인 4월 19일 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학생시위의 주역을 지방의 고교생으로부터 서울의 대학생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시위목적도 부정선거규탄에서 독재타도로 전환시켰다는 데 그 의의가 큽니다.

 

 

 

4월 19일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습니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제1공화국 시절, 소위 '부부통령'이라 불리던 권력의 제3인자로 기세충천하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현 대통령 경호실장급)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여 막았으나, 곡사포는 곧 무너졌습니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  이기붕은 이미 자택을 빠져나와 경기도 양주의 모 육군부대로 피신하였습니다.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기동화된 무장시위대원들은 저녁 무렵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었습니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원들이 종로 3가를 지나다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으며 이곳에서 쌍방 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습니다.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 밤거리를 질주하며 시위하던 수백 명의 시위대는 숭인동 근처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잠시 주춤했으나 밤 8시경부터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 쪽으로 몰려갔습니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무장시위대의 일부는 20여 대의 차량에 분승,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습니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 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습니다. 안암동 근처 산에서는 20일 새벽까지 무장시위대원과 무장경찰 사이에서 사격전이 끝까지 벌어졌지만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계엄군에 선제발포를 금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여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4월 19일 낮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신태환 서울법대 학장 등 7,8명의 학장들과 함께 국회의사당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까지 간 서울대 데모대를 찾아가 학교로 되돌아가라고 설득했습니다.  1960년 4월 27일 시민의 진정을 호소하는 학생 시위대가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이었습니다. 이어 그는 학생들의 귀교 조건으로 내세운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동대문경찰서장을 만나고 왔는데 서울대생들은 건대, 중앙대 등의 데모대 대열과 함께 중앙청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국민대학교 앞에 이르러 경찰들이 발포 사격을 가하자 그는 학생들의 앞에서 이를 가로막고 중지를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국민대학 앞에서의 경찰의 총격에 학생들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당시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은 사태를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습니다. 이어  윤일선은 학생들의 학교 복귀를 촉구하는 한편 경찰에 찾아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호소하여 학생들의 석방, 사면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면서 데모대에 가담했던 학생들도 자연 해산했고 그도 학교로 되돌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정재의 부하 깡패인 신정식은 4·19 혁명에 참가하는 경성전기공고 3학년 최기태 학생을 각목으로 구타하여 사망케 했습니다.

 

 

4월 19일 이후
계엄령에 주춤했던 시위는 시간이 감에 따라 더 번져갔습니다. 4월 23일, 장면 부통령이 사임하고 민주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4월 25일에 묵묵히 지켜보던 대학 교수들까지 시위를 함으로써, 이승만의 제1공화국 정부는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사회 전 계층으로 확산되어 시위가 확산되자, 주한 미국대사였던 W. P. 매카나기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서 하야할 것을 권유, 설득하였습니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 등도 이승만의 하야를 요청했습니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 당직을 사퇴하고 대통령직에만 전념하겠다 하였습니다. 주한 미국대사였던 매카나기의 방문을 받은 이승만은 이 모든 사태가 장면과 교회세력의 지시라고 설명했지만 메카 나기 대사는 3.15 부정 선거와 이를 저지르고도 숨긴 각료들 특히 경찰의 탓이라고 이야기하였고, 즉각적인 개혁을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 데모가 4·19로 절정에 이른 뒤, 1960년 4월 25일 오후 3시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모인 27개 대학교수 258명은 「대통령을 위시한 여야 국회의원들과 대법관 등은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재선거를 실시하라」는 요지의 14개 항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어 4백여 교수들은 <4·19 의거로 쓰러진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계엄하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감행, 서울시가를 행진했습니다. 이 4·25 교수단 데모는 시민과 학생들의 절대적 지지를 불러일으켜 그날밤부터 다시 시민·학생들이 궐기했으며, 26일 또다시 대대적인 데모를 촉발시킴으로써 마침내 이승만의 하야를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장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설득 끝에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를 결정했으며 4월 23일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로 시민들의 사망 소식을 전달받고 병원을 찾아 부상 학생들을 위문한 뒤, 방송에 애도의 뜻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습니다. 4월 24일 유혈사태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직 사임선언을 했으며 4월 26일 오후 1시에 이승만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960년 5월 29일. 하와이로 출국하는 이승만 박사와 전별하는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File:1960년 5월 29일 이승만.jpg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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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출처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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