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제 76주년 제주 4.3 사건

M.R. 2024. 4. 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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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심심한 M.R.입니다. 

어제까지 미세먼지는 두고 하늘은 맑고 약간 덥다 느껴지는 날씨였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흐리고 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네요..하늘도 오늘이 무슨 날이었는지 아는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오늘은 제주4.3 76주년입니다. 제주도에서는 전 공직자와 시민을 대상으로 4․3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염원과 제주4․3희생자를 추모하는 '동백꽃 배지 달기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다고 합니다. 동백꽃은 제주4·3의 영혼들이 붉은 동백꽃처럼 차가운 땅으로 소리없이 스러져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합니다. 겨울에 피어 2~3월이면 지상으로 떨어지는 새빨간 꽃송이는 마치 4·3 당시 희생당한 희생자들을 떠올리게 하지요. 동백꽃이 제주4.3을 상징하는 꽃으로 불리기 시직한 것은 1992년 강요배 화백의 4.3 연작 '동백꽃 지다'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지휘를 받는 빨치산 조직의 진압 과정에서 제주인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합니다. 

 

 

 

 

제주 4·3 사건(한국 한자: 濟州四三事件, 영어: Jeju uprising)은 목호의 난과 함께 제주도 역대 최대의 참사 중 하나이며,  보도연맹 학살사건,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사건,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에 민간인이 억울하게 학살되거나 희생된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이런 여러 사건 중에 제주 4·3 사건은 사망자 숫자 자체를 비교하면 제1공화국 시기에 일어난 단일 사건으로는 6.25 전쟁 다음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으로, 이는 당시 미군정과 그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그리고 이를 상대한 남조선로동당 세력들 모두가 민간인 학살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3이라는 명칭은 1948년 4월 3일에 발생했던 대규모 소요사태에서 유래하였습니다. 2003년 정부에서 발간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해 ‘제주도의 특수한 여건과 3·1절 발포사건 이후 비롯된 경찰 및 서청과 제주도민과의 갈등, 그로 인해 빚어진 긴장상황을 남로당 제주도당이 5·10 단독선거 반대투쟁과 접목시켜 일으킨 사건’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일본에서 귀환한 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및 식량 부족, 콜레라의 유행 등으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었고, 미곡정책 등에서의 군정의 정책 실패는 군정에 대한 민심을 악화시켰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47년 3·1절 집회 당시 경찰의 말에 아이가 치여 항의하러 모인 일반 시민에게 발포한 사건은 남로당 제주도당이 전개한 총파업을 초래하였습니다. 미군정은 총파업의 원인을 경찰 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 및 이를 이용한 남로당의 선동으로 분석하였으나, 사후 대응으로는 후자에 비중을 두어 서북청년회를 파견하여 강경한 검거작전을 전개했습니다. 조직이 노출된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단독선거 반대’를 슬로건으로 경찰지서와 우익인사에 대한 습격을 자행하였고, 5·10 선거를 방해하여 무효화시켰습니다.

정부는 사태 진압을 위해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중산간지역 전체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실시하였습니다. 작전 결과 중산간 마을의 95% 이상이 소각되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동시에 해안 마을에서도 ‘북촌사건’과 같은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고 무장대 역시 마을을 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민간인에 대한 살해를 저질렀습니다. 6.25 전쟁 기간 동안에는 예비검속을 명목으로 많은 주민들이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1954년 9월 한라산의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이러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습니다.

 

2020년 발간된 「제주 4·3 추가진상보고서」에 의하면 2019년 12월까지 4·3위원회에 심의·결정된 민간인 희생자는 총 14,442명이었습니다. 사망자 중 78.7%는 토벌대에 의해, 15.7%는 무장대에 의해 발생하였으며, 희생자 중 20.9%는 여성, 14.5%는 15세 이하 아동과 60대 이상 노인층이었습니다. 특히 초토화작전 시기(1948.10.11 ~ 1949.3.1.)에 전체 희생자의 67.2%가 발생하였습니다.

2003년 발간된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사태의 책임에 대해 군·경을 비롯하여 선거관리요원과 경찰 가족 등 민간인을 살해하고 지도부가 북한 정권 수립을 지지함으로써 유혈사태를 가속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한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의 무장대, 4·3 이전부터 도민과 마찰을 일으키고 제주도청 총무국장 고문치사 사건 등을 자행한 서북청년회, 초토화작전을 통해 대부분의 희생을 발생시킨 군 지휘부 및 계엄령을 선포하고 강경진압을 지시한 이승만 대통령, 사건 발발과 진압과정에 관련된 미군정의 책임을 모두 지적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제주도민들을 상대로 각 정치 집단들이 대부분 학살에 가담하거나 방관, 조장하였기 때문에 그 누구도 책임에 있어 자유롭지 못한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 사건은 폭동적 시위진압을 시작으로 반군 진압을 명분으로 한 학살, 이념과 종교적 신념에 입각한 학살, 특정 지역 거주민을 대상으로 한 학살, 보복성 학살 등등 사실상 지구상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학살의 유형이 총집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처 - 글 : wikipedia  사진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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