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공부

11. 탈인상주의 프랑스 화가 폴 고갱

M.R. 2024. 5. 27.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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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심심한 M.R.입니다.

 

 

자화상(1885)
폴 고갱 (프랑스어, 1848-1903)

 

 

 

폴 고갱(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 1903년 5월 8일)은 프랑스의 탈인상주의 화가입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고갱은  생전에는 그리 평가받지 못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인상주의를 벗어나 종합주의 색채론에 입각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생의 마지막 10여 년을 타히티를 비롯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서 생활하며 작업하였고 이 시기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고갱의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나 앙리 마티스와 같은 프랑스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고갱 사후 파리의 아트딜러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두 번의 유작전을 파리에서 개최하였고 그제야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고갱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로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판화, 도예, 저술 등의 다방면에서 작품을 남겼습니다. 고갱의 화풍은 클루아조니즘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대표작들의 주제는 원시주의에 바탕을 두었습니다.

 

 

 

File:Paul Gauguin 056.jpg - Wikimedia Commons

 

commons.wikimedia.org

 

타히티의 여인들 ( 폴 고갱, 1891)

《타히티의 여인들》(프랑스어: Femmes de Tahiti)은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폴 고갱이 1891년에 그린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타히티섬 해변가에 있는 두 여인을 그린 그림으로  현재 프랑스 파리에 있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고갱은 1년 뒤 《파라우 아피》(타히티어: Parau Api)라는 비슷한 그림을 그렸는데, 현재 이 그림은 독일 드레스덴의 근대 거장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타히티어로 파라오는 '단어', 아피는 '새로운'을 뜻하며  이를 조합하면 새로운 단어, 즉 뉴스를 뜻합니다.

 

 

피라우 아피(폴 고갱, 1892)

 

 

 

증권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1873년 고갱은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파리 9구에 살고 있었는데 근처에 종종 인상파 화가들이 모이는 카페가 있었습니다.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고 이들과 어울렸습니다. 고갱은 일요일에 피사로를 방문하여 채소밭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1877년 고갱은 "다리를 건너 빈곤층이 사는 신시가"인 보지라르 구역에 화실이 딸린 집을 마련하고 이사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전직 증권 중계인이자 화가로 전업한 에밀 슈페네 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고갱은 《보지라르의 시판용 채소밭》과 같은 그림을 1881년과 1882년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하였으나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그림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보지라르의 시판용 채소밭

 

 

File:Paul Gauguin 064.jpg - Wikimedia Commons

 

commons.wikimedia.org

 

 

1882년 주식시장 붕괴는 미술시장 역시 위축시켰습니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취급하던 아트딜러 가운데 가장 큰 손이었던 폴 뒤랑 루엘 역시 큰 타격을 입었고 고갱과 같은 신규 작가의 작품을 구입할 여력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갱은 2년간 전속 계약을 맺고 작업하였으며 느리긴 하지만 차츰 인지도를 쌓게 되었습니다.  2년 동안 고갱은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였으며 간간히 폴 세잔과도 작업하였습니다. 1883년 10월 폴 고갱은 피사로에게 자신이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전업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니 도와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이듬해 1월 고갱은 가족들과 함께 루앙으로 이사하였습니다. 루앙은 파리보다 집값이 싸지만 멀지는 않아서 고갱은 여름이 오면 피사로를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험은 그해말 메테가 아이들을 데리고 코펜하겐으로 가면서 끝났습니다. 고갱은 1884년 11월 자신의 작품과 도구를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곧이어 자신도 아내에게 갔습니다. 이때 보낸 작품들 몇 점은 아직도 코펜하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코펜하겐 삶은 녹녹지 않았고 1년여 만에 고갱은 파리로 돌아갔습니다.

 

고갱은 6살 난 아들 클로비스와 함께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파리의 미술계는 다시 돌아온 고갱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클로비스가 병을 앓게 되자 고갱은 누나 마리의 돈으로 아들을 기숙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1885년 한 해 동안 고갱은 몇 점 밖에 그림을 그릴 수 없었습니다. 1886년 8회 차이자 마지막이었던 인상파 전람회에 고갱은 19 점의 그림과 목판화를 출품하였습니다. 이때 전시된 작품은 대부분 루앙이나 코펜하겐에서 그린 것으로 새로 작업한 것이라곤 예전에 그렸던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 위로 옷을 덧입힌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펠릭스 브라크몽이 고갱의 작품 하나를 샀습니다. 이 전시회는 당대 아방가르드의 선두로 평가받던 조르주 쇠라의 작품도 전시하였는데 고갱은 쉬라의 신인상주의니 점묘법이니 하는 것을 경멸하였습니다. 이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주선하고 쉬라를 초대한 피사로와 의견 대립으로 이어졌고 결국 둘은 절교하였습니다.

고갱은 1886년 여름을 브르타뉴반도의 퐁타벤에서 보냈습니다. 고갱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무엇보다 물가가 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에 젊은 화가들이 몰려든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고갱은 다혈질에 권투와 펜싱을 즐기는 사람이었지만 이 느긋한 휴양지에서 새로운 친분을 쌓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이 시기 고갱은 주로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퐁타벤의 화가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찰스 라발로 고갱에게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적 풍광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즐겼습니다.

 

이 여름에 고갱은 제8차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였던 피사로 화풍의 누드화를 찢어버리고 대신 《브르타뉴의 양치는 소녀》와 같은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당시 퐁타벤에는 영국의 랜돌프 칼데콧이 그린 삽화를 사용한 브르타뉴 여행 안내서가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고갱은 이 안내서의 그림들을 의도적으로 따라 그렸습니다. 그러면서 새로 사귄 화가들처럼 자신의 작품도 보다 원색을 많이 쓰는 화풍으로 변화를 시도하면서 브르타뉴 지역의 소녀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이때의 습작들은 나중에 파리로 돌아와 《네 명의 브르타뉴 여성》과 같은 작품을 제작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브르타뉴 소녀들의 원무, 퐁타방(1888)
폴 고갱 (프랑스어, 1848-1903)

 


고갱은 라발의 권유대로 파나마와 마르티니크를 여행하였고, 여행 뒤엔 다시 찰스 라발, 에밀 베르나르, 에밀 슈페네 커를 비롯한 여러 화가들과 함께 퐁타벤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들은 상징주의를 내세우고 퐁타벤 화파를 결성하였습니다. 고갱은 유럽의 전통적 화풍, 특히 인상주의가 상징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나 부족하다고 여겼고 아프리카와 동양의 미술이 갖는 강렬함에 끌렸습니다. 당시 유럽에선 특히 일본의 채색판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1889년 벨기에의 화가 스무 명이 결성한 레 베(프랑스어: Les XX, 20}}는 고갱의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클루아조니즘과 종합주의

고갱은 민속 예술과 우키요에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클루아조니즘에 동참하였습니다. 클루아조니즘은 미술 평론가 에두아르 뒤자르댕이 에밀 베르나르의 작품을 평하면서 단색의 평평한 여백과 외곽선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화풍을 중세의 칠보(cloisonné) 공예에 빗대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갱은 베르나르의 화풍이 그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것이라고 느꼈고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고갱은 1889년 《황색의 그리스도》를 그리면서 클루아조니즘의 정수를 구현하고자 하였습니다. 색상은 보다 원색적으로 표현되었고 두터운 외곽선으로 경계를 뚜렷하게 남겼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 고갱은 전통적인 그라디에이션으로 명암을 나타냈기 때문에 외곽선으로 둘러싸인 대상은 마치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고갱은 자신의 화풍을 더욱 밀어붙여 종합주의로 발전시켰습니다. 종합주의는 화면을 구성하는 각각의 색이 모두 동등한 역할을 맡아 어느 하나가 주되고 다른 것은 부수적인 것을 거부하는 사조입니다.

 

황색 그리스도(1889)
폴 고갱 (프랑스어, 1848-1903)

 

 

 

1890년, 고갱은 다음 작품 활동을 타히티에서 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1891년 2월, 파리의 드루오 호텔에서 그림 경매에서 성공과 다른 것의 수익으로 필요한 자금을 모았습니다. 1891년 4월, 고갱은 타히티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그해 6월 파페에테(Papeete)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일체의 유럽 문명이 닿지 않은 이상적 원시로서 타히티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그림 소재로는 당시 촬영된 사진과 이미 나온 그림들을 참조하는 등 무척 신중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고갱의 기대와 다르게 타히티의 식민 수도 파페에테는 이미 유럽화 되어 있었습니다. 고갱이 생각한 원시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었고 그는 유럽식 복장을 한 타히티 사람들을 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갱은 에드몽 드 보비와 같은 사진가를 연출 사진을 빌려 이상화된 원시 자연 속의 여인을 그렸습니다. 1901년 출간된 고갱의 편지집 《노아 노아》에서 그는 자신이 타히티를 환상의 장소로 만들고 표절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고갱은 첫 방문에서 당시 13세였던 테하아마나 결혼했다. 고갱은 44세였다. 고갱은 메테와 정식으로 이혼한 것도 아니어서 중혼죄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미성년자 약취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국이라면 중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 남성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성적 방종은 불문에 부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갱은 타히티로 갈 당시 매독에 걸려 있었는데, 19세기인 당시로서는 별다른 치료약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갱은 이를 뻔히 알면서도 10대 소녀들과 성관계를 가졌습니다. 고갱은 13살의 아내를 모델로 한 누드화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를 그렸습니다. 타히티 생활을 마친 고갱은 원주민 아내를 아무 죄책감 없이 버리고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유령이 그녀를 지켜본다》, 1892년, 얼브라이트-녹스 미술 갤러리, 뉴욕 버팔로

 

 

고갱은 1893년 8월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옥션 참가의 기회는 놓쳤지만 그는 타히티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그려 다음 전시회에 출품하였습니다. 1894년 11월 열린 듀랑-루엘 전시회에 출품한 고갱의 작품 40여 점 가운데 11점이 팔렸고 고갱은 드디어 명성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갱은 1894년 자신의 여행담을 담을 《노아 노아》에 들어갈 목판 인그레이빙을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그 해 여름엔 퐁타벤을 찾았습니다. 1895년 2월 드루오 호텔은 1891년과 유사한 경매를 열었지만 고갱의 작품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고갱의 작품을 본 아트딜러 앙브르와즈 볼라르가 3월에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고 하였지만 고갱이 제때에 작품을 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산되었습니다. 이 즈음 고갱은 아내 메데와 정식 이혼 절차를 밟았습니다.  1895년 6월, 고갱은 다시 타히티로 떠나기로 마음먹고 친구로부터 뱃삯을 받았다. 이로서 그는 다시 유럽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1895년 6월 28일 고갱은 다시 타히티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파페에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땅을 얻고 널찍한 화실을 갖췄습니다. 타히티의 싼 물가 덕분에 고갱은 말과 수레를 구할 수 있었고 그가 원하던 생활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고갱은 내키는 대로 파페에테와 자신의 집을 오갔습니다. 1901년 고갱은 스스로 《레 게페》(Les Guêpes, 말벌)을 창간하고 편집장이 되어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신문은 총독과 식민관료를 비꼬고 조롱하는 내용으로 가득했지만 그렇다고 원주민의 입장을 대변해 주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주민에게도 불편한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타히티에 돌아온 첫 해 동안 고갱은 단 한 점도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목판화 몇 개만을 제작했을 뿐이었습니다.

고갱은 프랑스로 돌아간 동안 해변에서 술을 먹고 돌아다니다 병을 잘못 밟는 바람에 발목을 다쳤었습니다. 타히티에 온 다음 상처부위는 계속해서 통증을 줬고 다른 건강상태도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매독도 여전했지만 원주민 여성을 상대로 성적 방탕을 그치지 않았으며 가끔은 이 때문에 구속되기도 하였습니다.

1897년 4월 그가 아끼던 딸 알린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이 달엔 그동안 공짜로 쓰던 마구간 부지가 팔려서 새로 마구간을 지어야 했고, 살던 집을 보다 사치스러운 목조 건물로 개조하려고 은행 대출까지 받은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일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결국 그해 말 은행은 거래 중지를 통지해 왔습니다.  건강 악화와 딸의 죽음, 빚 독촉이 겹치자 고갱은 매우 침울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는 이해에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제작하였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대작임을 직감하였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보스턴 미술관, 보스턴, 매사추세츠

 

 

File:Gauguin - D'ou venons-nous Que sommes-nous Ou allons-nous.jpg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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