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오늘은 6.25 전쟁 74주년입니다

M.R. 2024. 6. 2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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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심심한 M.R.입니다.

오늘은 6.25 전쟁 74주년입니다.

 

 

 

 

 

File:Korean War Montage 2.png - Wikimedia Commons

 

commons.wikimedia.org

 

 

오늘 전국 곳곳에서 참전 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6.25 전쟁(六二五戰爭) 또는 한국 전쟁(韓國戰爭, Korean War)은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폭풍 224' 라는 계획에 따라 삼팔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대한민국이 침공 당하면서(남침) 발발한 전쟁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고착화된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합니다.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등이 참전하여 세계적인 대규모 전쟁으로 비화될 뻔 하였으나,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일단락되었습니다.

 

휴전 이후로도 현재까지 양측의 유무형적 갈등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반공 양강 진영으로 대립하게 된 세계의 냉전적 갈등이 전쟁으로 비화한 대표적 사례로, 냉전(冷戰)인 동시에 실전(實戰)이었으며, 국부전(局部戰)인 동시에 전면전(全面戰)이라는 복잡한 성격을 가졌습니다. 이는 유엔군을 비롯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연방까지 관여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최대의 전쟁입니다.

 

전쟁 이전 미리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과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협조와 지지를 얻은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3시 30분 38도선과 동해안 연선(沿線) 등 11개소에서 경계를 넘어 삼팔선 이남으로 선전포고도 없이 진격하였습니다. 조선인민군의 대공세에 유엔은 미국을 주축으로 바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호를 의결하고 이 전쟁에서 대한민국을 원조하기로 결정하고 파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7월 7일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이 조직되었습니다. 인민군은 무방비 상태였던 중부지방과 호남지방을 삽시간에 휩쓸었고 연합군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배수진의 결전을 전개하였습니다.

연합군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하여 10월 10일 평양에 이어 압록강 부근까지 이르렀으며 내만주에 핵폭탄을 공격해야 한다고 했으나 못했습니다. 11월 중순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하여 전세가 다시 뒤집히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혜산진까지 진격하던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를 1·4 후퇴라고 한다. 그러나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우세한 화력을 앞세워 다시 인민군을 몰아붙여 3월 15일에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1951년 6월 23일 첫 휴전 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포로 송환 등 여러가지 갈등이 많아 전쟁이 계속 이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결국 6.25 전쟁 지속에 반대하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서고 1953년 7월 27일 22시에 체결된 한국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인하여  한반도는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대한민국과 북한 두 국가가 휴전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한 직후부터 1970년 5월까지 20년 동안 물자와 외화부족 문제를 무상으로 지원해 주었으며, 특히 1950대말까지는 유일한 외자도입 창구로 한국 경제부흥에 미국의 한국 원조 정책이 가장 큰 기여를 해주었습니다. 미국의 한국 무상원조는 약 44억 달러, 유상원조는 약 4억 달러에 달하여 한국 경제의 투자재원 마련, 국제수지 적자보전 및 경제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미국의 원조는 그 당시 가난했던 한국 정부 예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대다수의 언론은 공식적으로 6·25 사변 혹은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내전적 의미를 강조하는 경우 한국동란, 6·25 동란이라 불립니다.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에는 6·25라고 합니다.
육십갑자를 적용하여 경인동란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으며  영어 원문의 번역을 통해 한국 전쟁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일본에서 쓰이는 용어로 중화인민공화국도 가끔 씁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 (抗米援朝/抗美援朝) 이라고 부릅니다.
미국과 캐나다 등 서구 국가들은 제2차 세계 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벌어져 젊은 세대들이 잘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46] 혹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Inch'ŏn landing) 또는 인천 전투(Battle of Inch'ŏn)는 1950년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휘 아래 조선인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인천에서 유엔군과 대한민국 국군이 펼친 상륙작전입니다. 작전의 제1단계는 월미도의 점령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5시 시작된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미 제5해병연대 3대대가 전차 9대를 앞세우고 월미도 전면에 상륙하였고  월미도는 2시간 만에 완전히 미군에 의해 장악되었습니다. 미군은 부상 7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었으며, 인민군은 108명이 전사하고 106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어 제2단계로 국군 제17연대, 미군 제7사단, 미국 1 해병사단이 주도한 인천반도 공격이 이어졌다. 인민군 제18사단과 인천 경비병력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 미군 제1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는 인민군의 주력이 규합할 시간을 성공적으로 빼앗아버리며 인천 장악에 성공하였습니다.

미군은 이 전쟁에 참전한 초기에 조선인민군에게 연패하며 경상도까지 밀려 내려오다가 결국 한반도의 허리 부분을 장악한 이 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전황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File:IncheonLandingMcArthur.jpg - Wikimedia Commons

 

commons.wikimedia.org

 

 

 

 

글, 사진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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