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심심한 M.R.입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풍경화가에 대해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 1839년 10월 30일 – 1899년 1월 29일)는 잉글랜드인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인상주의 풍경 화가입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대부분의 삶을 보냈지만 영국 시민권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야외 풍경을 그리는 데 헌신한 인상파 화가 중 가장 일관적이었습니다. 그는 인물화로 거의 벗어나지 않았고, 르누아르와 피사로와 달리 인상파가 자신의 예술적 요구를 충족시켜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슬레는 파리에서 부유한 영국인 부모인 윌리엄 시슬레(William Sisley)와 펠리시아 셀(Felicia Sell)에게서 태어났습니다. 1860년대 초에 그는 마르크 샤를 가브리엘 글레르의 작업실에서 공부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와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등과 친하게 됩니다. 그들은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사실적으로 포착하기 위하여 야외에서(프랑스어: en plein air) 풍경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혁신적이었던 이런 접근법으로, 좀 더 색채가 풍부해졌고 일반 대중들이 익숙해진 시각보다 더 넓게 그려졌습니다. 그 결과로 시슬레와 그의 친구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작품을 전시하거나 팔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재정적 곤란에 시달리는 동료 학생들과는 달리 시슬레는 그의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았지만 말입니다.
시슬레의 학생 시절 작품들은 유실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진 알려진 작품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864년경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 인근의 오솔길"(Lane near a Small Town)입니다.
1866년 시슬레는 브르타뉴 지방 출신인 Eugénie Lesouezec과 결혼하여 2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1870년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재정적 지원이 끊겨, 시슬레는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혼자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이후 시슬레는 궁핍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이후에야 금전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시슬레는 후원자들의 지원을 받았고, 그 덕분에 영국으로 몇 차례의 짧은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1874년에 그린 햄튼 코트 주변의 템스 강을 그린 일련의 그림과 모레쉬르루앙이나 그 주변의 장소를 묘사한 풍경화가 있습니다. 나중에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인상파의 완벽한 순간"이라고 묘사했습니다.
파리의 옛 교외에 있는 센 강과 다리의 주목할 만한 그림은 그의 많은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옅은 녹색, 분홍색, 보라색, 먼지가 묻은 파란색, 크림색의 평온함이 특징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슬레의 표현력과 색의 강도가 증가했습니다.
몰리시 위어, 햄튼 코트( Molesey Weir, Hampton Court,1874)
알프레드 시슬레 (프랑스, 1840-1899)
라 타미즈 아베크 햄튼 교회( La Tamise Avec Hampton Church, 1874)
알프레드 시슬레 (프랑스, 1840-1899)
라 센 프레 드 부지발( La Seine Près De Bougival, 1874)
알프레드 시슬레(프랑스, 1840-1899)
라 마르 오 카나드( La Mare Aux Canards, 1875)
알프레드 시슬리 (Alfred Sisley ) (프랑스, 1840-1899)
Veneux-Nadon의 겨울의 태양 (1879)
알프레드 시슬리(프랑스, 1840-1899)
1880년에 시슬레 가족은 19세기 초부터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작업하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인근에 있는 모레쉬르루앙(Moret-sur-Loing)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미술사학자 안 풀레(Anne Poulet)는 "이곳의 조용한 풍경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기는 그의 재능과 완벽하게 맞았다. 모네와는 달리 사나운 대양이나 코트 다쥐르(Côte d'Azur)의 빛나는 색채의 풍경을 찾으려 들지 않았다."라고 언급했습니다.
봄의 과수원 ( Orchard in Spring, 1881)
Alfred Sisley (French, 1840-1899)
생마메스, 루앙 버스( Saint-Mammès, Loing Canal, 1885 )
알프레드 시슬레 (프랑스, 1840-1899)
Les Oies À Saint-Mammès (1885년경)
알프레드 시슬레 (프랑스, 1840-1899)
모레에서 생마메까지의 길( The Road from Moret to Saint-Mammès , 1883–85)
알프레드 시슬리 (프랑스, 1840-1899)
1857년에서 1961년 사이의 런던에서 지낸 시기와 1874년, 1881년 그리고 1897년 잉글랜드로 여행한 것을 제외하면 시슬레는 전 생애를 프랑스에서 보냈습니다. 윌리엄 터너(J. M. W. Turner)와 존 콘스터블(John Constable)의 그림과 시슬레의 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의 인상주의 화가로서의 발전에 런던에서 많이 보았을 그러한 화가들이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인상주의자들 사이에서 시슬레는 비록 시슬레가 덜 표현적이고, 더 작은 규모로 작업하기는 했지만 서로 그림이 비슷했던 모네의 그림자에 가려졌습니다. 미술사학자인 로버트 로젠블룸(Robert Rosenblum)은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보편적인 특징의, 완벽한 인상주의 회화의 비개인적인 교과서적인 발상"을 가졌던 공기와 하늘에 호소하는 그의 작품은 매우 인상적이다. 풍경에 집중했던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들보다 훨씬 일관적이었다."
1897년에 시슬레와 그의 파트너는 다시 영국을 방문했고, 마침내 8월 5일에 웨일즈의 카디프 등기소에서 결혼했습니다. 그들은 페나스에 머물렀고, 시슬리는 그곳에서 바다와 절벽을 그린 유화를 최소 6점 그렸습니다. 8월 중순에 그들은 고워 반도의 랭글랜드 만에 있는 오스본 호텔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그는 랭글랜드 만과 로더슬레이드(당시 레이디스 코브라고 불림) 주변에서 최소 11점의 유화를 그렸습니다. 그들은 10월에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시슬레가 그의 조상의 고향으로 간 마지막 항해였습니다. 카디프 국립 박물관에는 페나스와 랭글랜드를 그린 그의 유화 두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페나르트의 팔레즈( La falaise de Penarth, 1897)
알프레드 시슬레 (프랑스, 1840-1899)
그다음 해에 시슬리는 프랑스 시민권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두 번째 신청이 이루어졌고 경찰 보고서로 뒷받침되었지만, 질병이 개입했고 시슬리는 죽을 때까지 영국 국민으로 남았습니다. 그는 1899년 1월 29일 모레쉬르루앙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아내가 죽은 지 몇 달 후, 그의 나이 59세였습니다. 그의 시신은 모레쉬르루앙 묘지에 아내와 함께 묻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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